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카가미 히데오 (문단 편집) === 주니치 유니폼을 입게 되다 : 1947 === 패전 위기때문에 아예 리그가 열리지 않았던 1945년을 지나[* 이 무렵 고향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이했다. 이 시점에서 그의 국적은 [[일본 제국]]에서 [[미군정]]으로 변경된다. 그가 서류상 자국 선수에서 외국 선수가 되는 시점이었다.] 1946년 시즌 중반까지 감독직을 맡았는데 시즌 도중 나카지마 하루야스가 교진군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자 다시 선수로 돌아가게 되었다. 그러나 이해 6월, 종전후 고향인 히토요시 시로 귀향해 농사를 짓고있던 [[카와카미 테츠하루]][* 1938년부터 1942년까지 교진군에서 뛰었다가 전쟁때문에 징집되어서 전쟁터에서 구르다 귀향한 것이다.]를 교진군에서 데려왔는데 이때 가와카미가 "3만엔은 줘야 너네팀으로 돌아감. 안주면 안 감."를 외쳤고[* 이는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선수가 구단측에 계약금을 요구한 사건으로 기록되며 이를 "3만엔 홀드사건"으로 부른다.] 구단측에서 이를 받아들여 3만엔을 주고 데려왔는데 당시 1만엔을 받았던 나카가미는 "군대 가서 몇년을 쉰 저놈이 뭐길래 3만엔이나 받냐?? 나도 3만엔 줘!" 라고 외치기 시작했다. 구단측에서는 "아니 저 놈까지 주면 다른 놈들도 또 들고 일어날텐데 그럼 가와카미가 더 큰 액수를 요구할꺼 아냐?"라는 생각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에 빡친 나카가미는 이듬해에 교진군에 사표를 쓰고 나와 새롭게 창설된 "국민야구연맹"에 가입 신청을 했으나[* 1947년에 조직되었지만 1년만에 해체되었다. 하계리그와 추계리그로 나뉘어 져있었으며 4개팀이 51경기(하계 30경기, 추계 21경기)를 치뤘다.] [[어른의 사정]]으로 거절당했고 결국 [[주니치 드래곤즈|주부니혼 드래곤즈]]에 입단하게 된다. 주부니혼 입단 후 17승 15패 1.83을 기록하면서 순항하는듯 했으나 전반기가 끝나갈 무렵 어깨를 다치면서 후반기에는 경기를 뛰지 못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